[환경지식사전4_ 환경정의] "투발루와 북극곰을 지켜주세요"

2001년 봄, 한 남자가 나무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였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죽전택지지구 내 대지산 일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그 지역은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 환경운동가는 나무 위에 올라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개발을 막기 위해 개발하는 쪽에서 나무를 자를 수 없도록 시위에 나선 것. 주민들도 나섰다. 난개발로부터 대지산의 숲을 지키고 싶었던 주민들은 그 일대의 땅을 한 평씩 사기 시작했다.  

 

일명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자연 및 문화유산 지역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땅을 사들여 영구 보존하는 문화 환경운동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연을 지키기 위해 땅을 사기 시작했고, 나무 위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주민들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이 보존될 수 있도록 그린벨트를 요구했다. 정부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대지산 일대를 녹지 또는 공원으로 영구 보전하기로 발표했다.  

 

나무 위에서 벌어진 한 남자의 시위, 사람들은 이 일을 계기로 ‘환경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왜 나무 위에 올라가 생활을 해야만 했을까? 이 속에서 ‘환경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이 사건 속에서 ‘환경정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환경정의가 뭘까? 
 

환경정의는 ‘환경에 대한 평등’이다. 생각해보자. 환경이 오염되었을 때, 아니면 환경을 보호했을 때 그 피해나 영향이 누구에게나 같을까? 물론 아니다. 그런데 환경오염의 피해가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로 왕창 돌아간다면? 환경정의는 이런 불평등을 넘어서, 공평한 환경보호를 하자는 것이다. 
 

한 남자의 나무 시위가 있었던 2001년 당시, 용인시 난개발로 인한 문제는 주택건설업자와 토지소유자가 과도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마구잡이식 개발을 하면서 불거졌다.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거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적 피해뿐 아니라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래세대가 이 지역에 살면서 자연생태계를 누릴 수 있는 권리도, 동식물들이 자신들의 터전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갈 권리도 빼앗겼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이 지역의 개발을 원하고 이익을 얻는 것은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의 환경권을 희생당했다. 더욱이 건설업자와 토지소유자는 개발로 이익을 얻고 나면 이곳을 떠나갔다. 남겨진 문제는 남아있는 주민들과 정부가 책임을 져야 했다. 개발한 사람 따로 있고, 피해보는 사람 따로 있고?! 그러니 환경비용 부담의 차원에서도 공평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원 거주민들은 개발업자나 토지소유자에 비해 사회적 약자이고, 대지산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은 생물학적 약자인 셈이다. 환경적 약자도, 사회적 약자도 공평한 환경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환경정의’이다. 
 

최근에는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국제적으로 ‘기후정의’, ‘에너지정의’와 같은 말도 생겨났다. 역시 ‘환경정의’와 같은 차원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기후변화나 에너지 사용으로 인한 영향이나 피해도 사회적 약자나 환경적 약자에게로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   

 

환경정의 운동의 시작과 성공 

 

환경정의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환경운동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1890년에 시작된 자연보호운동이다. 초기의 환경운동은 인간 활동이 자연을 훼손시키면서 생겨났고, 지금도 자연보호운동은 중요한 환경운동 중의 하나이다.  

 

두 번째는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으로 활발해진 환경오염반대운동이다. 환경오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감하게 되면서 전 세계적인 환경운동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로 1980년대 환경정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환경오염의 영향이 저소득층이나 유색인종, 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정의 운동은 환경운동과 인권운동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환경정의 운동은 하나의 보고서가 시초가 되었다. 1971년 미국 환경심의위원회(Council on Environmental Quality)가 의미심장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환경위험과 소득과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후 환경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게 되면서는 이 보고서가 주목받게 되었고, 환경정의 운동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백인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농약 등에 의한 환경오염에 관심이 높았다. 그러다보니 저소득층 아프리카계 사람들이나 흑인들이 생활하는 지역이 유해폐기물처분장으로 많이 선택되었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서, 1982년 10월 체이비스 목사는 ‘환경인종차별주의(environmental racism)’라고 고발했고, 노동자들과 유색인종을 중심으로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환경정의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1987년에는 기독교연합 인종정의위원회에서 소수인종과 빈민층 주거지역에 폐기물처리장이 불공평하게 많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환경위험의 불평등 문제를 중심으로 한 환경정의 운동이 보다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환경정의 운동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부설기구였던 ‘환경개발센터’가 1998년 이 단체에서 독립하면서, ‘환경정의시민연대’라고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환경정의 운동을 시작했다(이후 이 단체는 2004년 ‘환경정의’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토지, 대기, 물, 먹을거리와 유해물질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환경정의의 관점으로 정책을 감시하고 운동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지산을 살리기 위한 한 남자의 나무시위는 이 단체에서 주도한 환경정의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정작 에너지를 많이 쓰는 나라는 미국,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다.> (출처: 인사이트 홈페이지, insight.co.kr)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이번에는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기 위한 형평성의 원칙으로 ‘환경정의’를 이해해 보자. 예를 들어보자.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국토포기 선언을 한 투발루라는 나라가 있다. 정작 에너지를 많이 쓰는 나라는 미국,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투발루나 몰디브와 같은 해안국이다. 지리적으로 불공평하다. 또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온도가 올라가고 있다고 난리다. 지구에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 양만으로도 앞으로 50년 동안의 온도는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동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온 나라들은 이미 많은 것을 갖춘 선진국들이다. 세계인구의 20%밖에 안 되는 선진국이 세계 자원소비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후진국들은 이제 막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발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지구온난화 문제가 계속되면서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모두 이산화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20%의 선진국이 배출한 소비나 오염의 책임을 나머지 국가들이 함께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대 내에서도 불공평하다. 게다가 국제회의에서 선진국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니 절차적으로도 불공평하다. 또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우리 자손들은 더워진 지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편리하게 생활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마음껏 배출할 수도 없다. 그러니 세대 간에도 불공평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 만하더라도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북극곰이 살 곳을 잃었고, 다양한 생물들 중에서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것들만 살아남는다.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 생태적으로 공평하지 않다. 
  

이렇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세대 간의 형평성, 세대내의 형평성, 지리적인 형평성, 절차적인 형평성, 생태적인 형평성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와 환경적 약자가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정의인 것이다. 


- 글 : 장미정, (사)환경교육센터 소장

* 인터넷미디어 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http://insight.co.kr/content.php?Idx=681&Code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