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의 붉은 바다
오창길((사)환경교육센터 소장)
미나마타시를 찾아서
“ 반갑습니다. 환경도시 미나마타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오지요”
쿠마모토현 환경정보센터에서 일하시는 퇴임교원인 마츠다상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는 공해도시에서 환경도시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미나마타시는 다양한 미나마타병에 관한 시설들에서 세계인들에게 공해문제의 피해를 발신하고 있다.
공해병의 대명사인 ‘미나마타병’에 대한 두 가지 추억이 있다. 첫째는 학창시절부터 수은중독=미나마타병이라는 명제를 공식처럼 외웠던 기억이 있다. ‘이따이이따이병’과 더불어 체육과목의 단골시험문제였다. 두 번째는 1990년대 중반 우리교육에서 출판된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를 통해서였다. 그 책은 우리에게 미나마따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알려주었고, 주변교사들과 아이들이 함께 교재로 가장 많이 사용했던 불후의 환경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미나마타병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환경오염이 먹이사슬에 의해 생겨난 인류 사상 최초의 병이며 「공해의 원점(原點)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9년 9월 4 일 아사히신문)
“정말 아름다운 바다이지요. 이제는 원래의 시라누이바다의 색깔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피해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일행을 안내한 요시나가 토시오씨(칸시라누이 플래닝) 대표는 시라누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칸시라누이 플래닝’은 미나마타에 대한 환경학습안내를 전문적으로 하는 여행사와 NPO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의 대표를 맞고 있는 그분의 부인도 미나마타병의 피해자 가족이였다. 우리는 요시나가 리미코 부인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나마타병은 아직도 보상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미나마타병에 대한 시선 때문에 미나마타시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어요. 전염병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요.”
고양이가 바다에서 날아오르고 있어요.
“ 고양이가 바다에서 날아오르고 있어요. 새들이 날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모습을 봤어요!”
1952년 미나마타시 바닷가에서는 동물들의 이상행동을 동네주민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에는 주민들의 손발이 뒤틀리는 등 중추신경계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칫소회사는 1908년 미나마타에 공장을 설립했다. 칫소는 화학비료를 생산하면서 일본 내 굴지의 화학공장회사로 성장하였고 미나마타시에 칫소회사의 생산 공장이 있었다. 이 증상은 칫소공장에서 나오는 수은으로 인한 것이 밝혀지면서 회사는 얼마 되지 않는 위로금으로 주민과의 분쟁을 해결하려 하였고, 정부는 미나마타지역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나 정화, 보상 등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병의 보상과 진실을 알리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미나마타 박물관은 민간에서 만든 미나마타병의 피해와 공해문제를 알리기 위한 시민 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의 관장인 엔도 쿠미오씨는 수십 년간 이병의 피해를 알리고 보상을 받기위해 노력하는 분이다.
“1932년부터 67년 까지 36년간 바다에 쌓인 수은의 총량은 200t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은은 자연적으로 정화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1975년 특별히 오염이 심한 45만평의 바다 바닥 흙을 파내어, 그 후 16년 동안 50억 엔의 비용을 들여 특수 강철판을 깐 매립지에 흙을 옮겨 담았습니다.”
미나마타 위령비가 세워진 것은 미나마타병 공식인정 50주년을 맞는 2006년 봄이나 되어서였다. 시라누이 겨울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314명의 영혼들의 위령비는 매립지를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워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대량 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의 욕망들이 많은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기업의 이익과 행정의 판단착오로 많은 환경문제들이 야기되어 미래 세대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감람석운동장이나 원전발전정책을 당장 폐기하고 미래세대의 삶을 생각하는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