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노벨과학상과 아시아 / 송상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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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에 들어서면 온 세계의 과학자들은 스톡홀름에서 날아오는 뉴스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올해는 일본이 네 사람의 수상자를 냈다고 한국 언론의 관심도 유별나다. 과학강국 일본이 저력을 보였으니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다. 아시아 사람으로는 인도의 타고르가 1913년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과학부문에서도 같은 나라의 라만(30, 물리학)이 처음이다. 이어 물리학에서 일본은 유카와(49), 도모나가(65)가 탔고 57년에는 중국 출신 미국시민 리와 양이 공동 수상했다. 생리·의학상은 인도계 미국인 코라나(68), 화학상은 일본의 후쿠이(81)가 첫 영예를 안았다. 그 뒤 아시아 수상은 크게 늘어나 물리학의 에사키(일본, 73), 팅(중국, 76), 살람(파키스탄, 79), 찬드라세카르(인도, 83), 추(중국, 97), 취(대만, 98), 화학의 리(대만, 86), 생리·의학의 도네가와(일본, 87)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 이후는 중국이 첸(2008, 화학) 하나뿐인데 일본은 화학에서 시라카와(2000), 노요리(2001), 다나카(2002)가 연속 수상했고 물리학에서도 고시바(2002)에 이어 올해 남부, 고바야시, 마스카와, 그리고 시모무라(화학)가 개가를 올렸다. 물론 국적이 미국인 사람들이 섞여 있지만 순혈 일본 사람이 열셋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노벨상에서 일본이 독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은 16세기부터 서양 과학기술을 수용·축적한 결과 메이지유신 때는 이미 근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주요 과학자들 밑에는 일본 제자들이 있었고 새 과학이론과 기술혁신은 거의 동시에 일본에 받아들여졌다. 일본은 과학기술에서 한국을 한 세기 앞서 있었던 것이다. 김동원 박사(존스 홉킨스대)가 작년에 쓴 는 니시나가 1920년대 코펜하겐에서 보어 등 세계 정상급 학자들과 겨룬 뒤 리켄(이화학연구소)을 중심으로 일본 과학계를 이끈 뛰어난 리더십을 그리고 있다. 니시나 없이 유카와, 도모나가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일본 수상자의 반이 넘는 일곱이 교토에서 배웠거나 일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과학의 성과가 하룻밤에 나오는 게 아님을 보여 준다. 일본 수상자 네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도호쿠대학 공학사로 시마즈회사 연구소에서 일하다 43살에 상을 받은 다나카다. 5년 전 제주 대한화학회 연회에서였다. 특강 사례를 받지 않아 화제가 되었던 그는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 정신이 없다며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 화학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었는데 어느 틈엔가 빠져 나가 기념사진은 허사가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노벨상 타령을 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60년대부터 아이링, 뤼넨, 베테 등 수상자들이 한국을 찾더니 요새는 웬만한 학회에 가면 으레 몇 사람 보인다. 그런데 기자들은 반드시 한국이 어떻게 하면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10여년 전 양첸닝이 왔을 때 기자회견에 통역이 나타나지 않아 내가 대타를 한 일이 있다. 똑같은 질문이 또 나와 창피했다. 90년대에 노벨상 지원본부를 만든 강주상 교수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다 주최한 여덟 나라 가운데 한국만이 노벨상을 못 탔다고 개탄한다. 이것은 한국이 경제와 스포츠에서는 잘 나가지만 과학에서는 아직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친 증거다. 유력한 후보 이휘소(물리학)는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후쿠이의 선배였던 이태규(화학)도 교토에 남아 있었다면 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들이 노벨상에 가까이 간 과학자들을 뽑았다. 평화상은 이미 탔고 해마다 오르내리는 문학상도 곧 올 것 같다. 과학상도 멀지 않았다. 정부는 조바심하지 말고 과학을 잘 밀어 주기만 하면 된다.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사)환경교육센터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