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는 리셰프(철학연구소 부소장), 추마코프(러시아철학회 부소장), 마르코프(국회의원)를 비롯해 원로, 여성, 소장이 망라되었고 외국인으로는 쿠추라디(터키, 전 세계철학연맹 회장), 칼보 마르티네스(마드리드대), 에치모비치(슬로베니아, 환경철학), 에른스트(독일, 여성주의철학), 장바이춘(중국, 러시아종교철학) 등이 참여했다. 러시아 철학자들은 지역은 물론, 종족(부랴트, 야쿠트, 타르탄), 종교(러시아정교, 불교, 이슬람), 이념(스탈린주의, 민족주의, 세계주의, 무신론)이 다채로워 흥미로웠다. 지역회의들의 주제는 문화간 소통, 러시아 극동 개발, 러시아-중국 관계, 인간과 자연, 과학철학, 과학과 교육, 관용 등이었는데 시간 제약으로 깊이 있는 논의가 어려웠던 것이 문제였다. 열차 안에서도 여성과 철학, 존재론, 다치논리, 이주민 문제 등을 주제로 원탁토론이 이어졌다. 베이징 올림픽과 함께 일어난 오세티야 문제에 관한 특별보고와 토론도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영미철학에서 잘 안 쓰는 존재론, 방법론, 가치론 같은 말들이 범람한다. 러시아 고유 철학이라고 하지만 독일관념론, 신칸트학파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종교철학, 정치철학은 보수색이 강하다. 과학철학은 맹신론, 무용론, 절충주의 등 다섯 가지 견해가 혼전을 벌이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로 위장된 실증주의라는 비판이 재미있다. 러시아 철학은 정체성을 찾으려는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러시아에는 2만명의 철학자가 있다는데 러시아철학회의 회원은 6천명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기술자, 사회과학자, 군인, 관료 출신이어서 응용에 강하며 대중화에 관심이 크다. 철학자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열정을 쏟고 있어 부러웠다.
한국과 러시아의 철학 교류는 2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옛 소련 붕괴 직후부터 이번까지 서울, 군산,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섯 차례 한-러 철학회의가 있었다. 러시아는 한국 철학계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데 한국은 러시아 철학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국교 회복 이후 한국의 러시아 어문학 전공자들은 크게 늘어났으나 러시아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랄 동쪽 넓은 지역이 유럽보다 아시아를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럽,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한국 철학은 러시아를 포함해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전쟁, 민족대이동, 혁명, 학살로 점철된 역사에 복잡다단한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러시아 사람들은 서유럽 사람들과는 달라 정이 많고 나누기를 즐겨 공동체를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빵과 보드카를 함께 나누며 끝없이 이어지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위로 나타난 보름달과 샛별에 환호했다. 내년 여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릴 러시아철학회의를 전후해 바이칼에서 한-러 철학모임을 갖자는 제의가 이번에 나왔다. 여행길에 만난 고려인 철학자 김블라디미르 교수(우랄대 철학과장), 허아브롤라 박사(철학·과학잡지 편집장)가 가장 반가워할 듯하다.
-9월6일 크로아티아 리예카에서.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