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서평] "호미"_ 자연은 변덕스러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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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변덕스러우나 그래서 늘 그러하다

박완서의 『호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은 아이에게 특별한 정서를 깃들게 하는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며 열아홉 살 때까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외할머니 생각을 하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계절이 바뀌는 시기나 날씨가 극성스러울 때면 부쩍 할머니 생각이 난다.
열일곱에 시집와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에서만 살았던 할머니는 농사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24절기를 꼬박 챙기셨다. 이제는 낯선 개념이 된 24절기. 24절기는 달로 만든 음력이 계절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것이 농사에 혼란을 미치자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이 기준이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이나 추분(秋分),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夏至),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지(冬至)는 물론이고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驚蟄) 등이 모두 24절기에 속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는 유머 감각이 뛰어난 분이셨다. 24절기의 하나인 소한(小寒)날 아침에는 양말을 한 켤레 더 신으라고 하시며 “대한(大寒)이가 소한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단다.”고 말씀하셨고 한여름 대서(大暑)날에는 “오늘은 염소 뿔도 녹는 날이니 대낮에 너무 뛰어다니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하셨다. 돌이켜보면 해마다 할머니의 당부는 늘 비슷했다.


따뜻한 햇살도 거센 강풍도 모두 자연이다

그러나! 계절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싶을 때도 많다. 아니 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늘 슬며시 배신감을 느낀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서 있어 보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겨울바람이 상상이나 되는가. 그러다 8월 15일 광복절이 지나고 며칠 있으면 가을은 여름바람 속에 도둑처럼 스며든다. 여전히 햇살은 바늘 끝처럼 따갑지만 바람은 꾸덕꾸덕 건조해진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습한 바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내게 『호미』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 마음을 풀라고 속삭였다.  

그러노라면 매일 아침 흙을 주물러야 한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내음을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 곱씹으면서 지루해지려는 삶을 추수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호미』 중에서
아, 변덕이 자연의 일부라니!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라니!


거리 두기에 익숙해지기

『호미』는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이다. 2002년 산문집 『두부』를 내고 5년 만에 다시 선을 보인 박완서 선생의 일상과 사색의 모음집이다. 박완서 선생은 서문에서 “산문집 『두부』를 낸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또 이렇게 그 후에 쓴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묶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다르다. 『두부』의 열혈 독자인 나는 박완서 선생의 다음 산문집이 나오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지인들에게 선물한 『두부』를 합하면 그 수가 두부 한 판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박완서 선생의 소설보다 산문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박완서 선생의 산문에서 여러 가지 위안을 얻는다. 그 가운데 두 가지를 들자면 우선 ‘거리 두기’다. 박완서의 글에는 ‘거리 두기’가 녹아있다. 『호미』에서는 이런 식이다.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

실은 우리 집 마당도 흙으로 돼 있다. … 이 작은 마당이 한겨울 빼고는 매일매일 나에게 일을 시킨다. 주로 나는 땅 위를 엎드려 기어다니면서 일을 한다. 한여름에도 아마 적어도 한두 시간은 매일매일 땅을 기어다닐 것이다. 땅은 내가 심거나 씨 뿌리는 것한테만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다. 바람에 날아온 온갖 잡풀의 씨앗, 제가 품고 있던 미세한 실뿌리까지도 살려내려 든다. 아마 내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땅은 그 잡것들 세상이 될 것이다. … 내가 땅 위를 기면서 하는 노동은 제가 잉태한 것은 어떡하든지 생산하고자 하는 땅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우고 즐기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과의 투쟁이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땅 위에 직립했을 때 가장 땅과 친하고 기어다닐 때 가장 땅과 적대적이라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호미』 중에서



포기하면서 도리를 깨닫다

두 번째는 체념이다. 나는 박완서 선생의 산문을 관통하는 체념의 정서에서 크게 위안을 얻는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나는 체념이 아주 나쁜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눈이 빨개지도록 책을 뒤졌다. 상대가 질려서 “응, 으응.”할 때까지 닦아세운 적도 많았고 내 성질을 못 이겨 몸이 아프기까지 했다.
그러다 우연히 체념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마음이 편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다 지나가는 거야, 하는 마음.
체념은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단히 이중적이다. 마치 약과 같다. 득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약.
“①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 ②도리를 깨닫는 마음”
국어사전에서는 체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나는 그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 견딘 모진 추위와 눈보라의 세월을 알기 때문에 오래오래 펴 있기를 바라지만 봄꽃의 만개기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하필이면 무슨 심통인지 비바람이 불어, 그 꽃들을 무자비하게 떨군다. 딱딱한 꽃봉오리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끈기 있게 어루만지던 따순 햇살과 부드러운 미풍을 보맨 것과 똑같은 자연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조급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낙화한 자리에 어김없이 열매가 맺어 있는 걸 보면 바람은 벌나비가 일일이 하기엔 역부족인 가루받이를 도와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도 한두 차례 봄추위와 강풍이 지나고 나면 달렸던 열매들이 대폭 솎아져 실하게 자랄 것만 남는다.
-『호미』 중에서

『호미』는 곳곳에서 체념은 포기와 다르며 변화는 변덕이 아님을, 변덕과 그러함[자연(自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이즈음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살면 허망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 준다. 다행이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호미』 중에서

『호미』에서 박완서 선생은 자신도 역시 허망함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술회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다는 것을 큰 복으로 알고 있다.
-『호미』 중에서

『호미』는 자연에는 ‘따순 햇살’ ‘무자비한 바람’이 공존하듯이, 우리 삶에는 추슬러야 하는 허망함과 유쾌한 일상이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한다. 땅이 땅을 찾아온 모든 생명에게 기회를 주듯 자신에게 기회를 주라고, 원래 인간은 소박하게 거두게 되어 있다고 말이다.


* 글: 오윤정 님(출판기획자, 환경교육센터 기획위원)